주후 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곧 동정심이란 단어는 어원학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라는 뜻이다. 중산층을 비롯하여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은 사회의 밑바닥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한 번쯤 직접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성탄절을 맞아 잔치를 벌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배가 고픈데 하늘에서는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 소가 아닌 한 인간이 거할 곳이 마구간밖에 없다.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밑에 잇는 사람들이 내 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다.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다. 이렇게 하늘이 인간을 실망시킬 때 인간이 어떻게 느끼는지 직접 경험하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중산층 사람도 직접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말리 공화국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아무 죄도 없는 형제들이 몇주씩 굶어야 하는 것처럼 그들도 한번 굶어보는 것이 어떨까?
예수님은 강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흑인이나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부잣집 정원에 들어가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천국에 들어간 도둑은 천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지만, 세상에서 가난한 집 아이는 부잣집 아이와 놀기도 어렵다.
개는 여주인과 소파에 누워 지내지만, 종일 정원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부엌에서 종일 서 있어서 발이 퉁퉁 부은 하녀는 주인과 한자리에 앉지도 못한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에게 극단적 호의를 품는 것이 잘못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물로 나는 무분별한 호의가 그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 많은 중산층의 논리가 아니다. 실제로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 굶주리거나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는 인류의 60%에게 현실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 즉 사회에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집에 초대해 잔치를 벌이기를 바라신다(눅14:13). 예수님은 구제불능의 죄인인 당신을 천국으로 초대하셨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순교자의 소리 리처드 웜브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