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2023년5월27일 토요일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28:17
의심에는 긍정적 가치가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그때까지 정설로 인정되던 천동설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아인슈타인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의 천체 물리학의 절대성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과학이 어느 정도로 발달해 있을까? 아브라함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다신교를 의심치 않았다면, 예수님 제자들이 자기 나라 대제사장들이 판결한 대로, 예수님이 불경죄를 범했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더라면 우리의 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심은 정당하고 꼭 필요하다. 겉으로만 확신하는 것보다 정직하게 의심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는 경건한 기독교인 가운데 사실은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 많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7:22)라고 묻는 성직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꾸짖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무조건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아라.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안전하다. 정직한 의심이란 바로 진리를 찾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영혼은 깊이 고뇌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정직하게 의심하는 것은 곧 진리를 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영혼의 방황이기도 하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사슴이 찾는 것은 물에 관한 설교나 책이 아니다. 사슴은 갈증 해소에 관한 다양한 토론에도 관심이 없다. 시원하고 좋은 물에 관한 고결한 생각이나 시적인 어휘는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물의 분자 구조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일도 목마른 영혼에게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 그 자체를 구한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 사람들은 강물같은 눈물을 흘린다. 하나님을 찾지 못하여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았는가? 시편 기자처럼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2,3
/저 높은 곳을 향하여-순교자의 소리 리처드 웜브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