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18~41장
인사/내가 먼저 인사합시다
묵상기도/요4:24
찬송/1장
성시교독/교독문5시편8편
신앙고백/사도신경
찬송/405장
기도/지석임사모
성경봉독/이사야33:6
찬송/406장
영상/예배를 예배답게
설교/평안/표세철목사
예화-아름다운 기도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 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style)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 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세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이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 (lce breaking)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선물)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때는 전혀 끔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變化)다.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 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샬롬?/신원철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안함이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복수심’과 ‘욕망’과 ‘질투심’과 ‘분노’와 ‘교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평안할 수 없는 요인을 3가지로 나누어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앙적 교만은, 모든 번민과 고민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잃고, 불안에 싸여 있다면 자신을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고민은 절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안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중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입니다.
나의 평안을 해치고 있는 상대방을 죽이고, 항복시킴으로써 얻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전쟁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해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보다는 서로 타협함으로써 평안을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타협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오늘 우리의 정치에서 흔히 보고 있습니다.
타협이란 어느 편이든지 50%는 양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째는 ‘망각’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적인 처세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인간은 ‘소유’에 의하여 평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안’이란 많이 소유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소유는 불안과 근심만을 더하여 줄 뿐입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소유한 자는 점점 더 많은 소유를 원하고, 더 많은 욕심을 부립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만을 더하여 줄 뿐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평안을 얻고자 합니다.
전 1:18에서는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필요 없는 지식만을 많이 알아서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거나 복잡해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평안은, 인간의 소유나 지식, 명예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봉헌/다같이
찬송/408장
교회소식/인도자
찬송/53장
축도/표세철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후2022년1월23일 주일낮예배 (0) | 2022.01.23 |
---|---|
주후2022년1월16일 주일낮예배 (0) | 2022.01.16 |
주후2022년1월2일 신년주일낮예배 (0) | 2022.01.02 |
주후2021년12월26일 주일낮예배 (0) | 2021.12.26 |
주후2021년12월25일 성탄절예배 (0) | 202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