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11시 인도:표세철목사
찬송/139~158장
인사/내가 먼저 인사합시다
묵상기도/마21:9
찬송/140장
성시교독/교독문129종려주일
신앙고백/사도신경
찬송/141장
기도/표세종안수집사
성경봉독/히브리서9:11~15
찬송/144장
설교/예수님의 제사/표세철목사
전 세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기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대형 참사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전쟁의 고통은 사람들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가져온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에 대한 바람이 강해지는 것이다. 기근은 세계적인 나눔의 실천이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대형 참사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고통은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미리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고통 받는 사람이야 무슨 말로 위로를 해도 안 되지만, 뒤에 남는 사람에게는 타산지석이 된다. 뒤의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대책을 세운다. 그렇다면 먼저 고통을 당한 사람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먼저 고통을 받은 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분이 계시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기가 먼저 남의 고통을 짊어진 분이 계시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사람들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해 주신다. 누구신가?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사람들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방법이 생겼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제물로 내놓으셨다. 예수님은 몸의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에게 죄의 고통, 어둠의 고통,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집전한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소, 양, 비둘기를 주로 드렸고 가끔 곡식을 드린 적도 있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린 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이방 종교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지 않으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귀하게 창조하셨고,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명하셨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 대행자로 활동하였다. 그런 사람을 어찌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시겠는가? 다만 사사기 11장의 입다의 딸이 번제로 드려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사사기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번제로 드렸다는 구절이 없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후손, 레위 지파에서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보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는 일도 달랐다. 반차도 달랐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히 6:20). 이 대제사장은 다른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렸다. 자기 몸을 화목제의 제물로 드렸다.(요일 2:2). 구약의 대제사장은 속죄를 선포하였다. 예수님은 속죄뿐만 아니라, 장래 좋은 일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예화-병상에서 사랑의 능력에 눈을 뜬 자매
인생을 뒤바꿔놓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처음 눈을 떴던 것은 시카고의 무디 성경 학교에 다니던 시절 병에 걸렸을 동안이었다고 고백하는 간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의사는 즉시 수술을 해서 종양을 제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일 학교에 다닐 때 가르쳤던 교사 한 사람이 조그만 책자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제임스 맥컨키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책이었습니다. 쭉 읽어가면서 하나님을 으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그분의 사랑이 심령 속으로 뚫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병실 침상은 그대로 산제사의 제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주님을 섬기고 싶은 깊은 열망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그 어느 것보다도 주님의 뜻을 더욱 사모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병실 침상은 저의 산제사의 제단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저를 산 제물로 드리기 원합니다.
이제 주께서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의 통로로 드립니다."
그때 그 위기를 넘긴 이후로 몸은 완전히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았고 아이도 넷이나 낳을 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죽기 직전에 짤막한 글 하나를 보내왔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적을 베푸셨음을 잊지 말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하나님께서 심령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을 깊이 새겨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사랑,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사랑, 감미로우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랑,
진리와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랑 바로 이러한 사랑을 말입니다-http://cafe.daum.net/yacop
- 예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몸을 제물로 내놓으신 분은 자기 몸을 제물로 내놓아야할 만큼 죄가 많은 분이 아니었다. 타인의 의해 제물로 드려질 만큼 약한 분도 아니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히 4:15). 그리고 그분은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 대제사장이 먼저 고통을 당하고 그 고통의 대가로 다른 제물들의 고통을 씻어 주었다. 율법에서 드려지는 짐승제물이 다시는 드려지지 않았다. 짐승제물들의 죽음과 고통이 중단되었고, 어찌 보면 짐승 제물에게도 고통을 당하지 않는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짐승은 여전이 사람에 의해 키워지고,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 짐승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식탁 위에 올라간다.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심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었다. 죄의 대가는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죄의 대가로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사람의 속죄가 이루어졌다. 짐승 제물은 매년 절기 때마다, 제사 때마다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으로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단번에 드려짐으로 사람들의 속죄를 이루었다. 짐승의 피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예화-말하는 무덤 미국에서 말하는 묘석(墓石)이 판매되고 있다 한다. 뉴저지의 한 묘석회사가 개발, 발매하고 있는 이 묘석은 태양전지와 컴퓨터를 내부에 장치, 고인의 업적을 녹음해 넣거나,정치가면 생전의 명연설을, 교수면 명강의를, 가수면 히트곡을 녹음해 넣고 죽어서도 영원히 연설과 설교와 강의와 노래를 되풀이하게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묘지에 이 말하는 묘석이 널려있을 것을 상상해 보자. 한식(寒食),추석에 성묘하러 가면, 정치가의 무덤에서 "친애하는 여러분"하고 불러세워 놓고, 가수의 무덤에서 "당신은 바보야"하고 조롱하는 것같은 해프닝이 벌어질 것이다. 또 기계가 고장이라도 나면 "당신은 바보야"만을 계속 거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묘석을 한국에서 판매하게 되면 그 반응이 어떨까? 적지 않게 팔릴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민족은 죽은 조상을 굳이 살아있는 것으로 고집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을 부정하고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림없다. 조상제사 역시 효도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이러한 습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저명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는 이렇게 평하였다. "한국인의 제사는 의례적 생명보험이며, 죽어서 까지 이렇게 삶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소화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제사의 심리학적 기저에는, 말하는 묘석처럼,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숨어있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제사를 인정치 않은 것은 이러한 제사가 사실은 영생의 유일한 길과는 정반대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속죄란 지은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속량 받는 일을 말한다. 속죄란 죄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속죄를 위해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했다. 속량을 위해 대제사장은 해마다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속죄에 대한 확인을 받아야 했다. 한편 제사장은 부정한 사람에게 짐승의 피를 뿌렸다. 이는 부정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었다. 구약은 사람이 짐승의 피를 뿌렸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독생자의 피를 흘리게 만드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피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대가였다. 예수님의 피는 죽은 양심을 살리고, 왜곡된 영성을 바로 세운다. 내버려두면 지옥에 갈 영혼을 예수님의 피로 인해 천국으로 돌이키는 길이 열렸다. 모른척하면 더러움을 뒤집어쓰고 어둠에 살 사람들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고 빛의 길을 가게 하셨다. 이 모든 은혜는 예수님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님이 동시에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예수님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속죄 공로로 인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러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호산나로 환영하는 것이 속죄의 영적 차원으로 보아 당연하다.
- 우리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았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사람의 죄를 대신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사람들에게 대신 선포하는 사명을 가졌다. 대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사람의 죄를 말하고, 하나님은 제물을 태우심으로 용서를 말하셨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옛 언약의 중보에 불과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중보는 제한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중보, 완전한 중보를 원하셨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율법으로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직접 중보를 보내주셔야 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가 곧 독생자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제물로 삼으심으로 중보의 역할을 완벽하게 이루도록 하셨다. 예수님에 의해 속죄함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천국의 기업이 주어진다. 율법에 의해 속량을 받아도 가나안 땅에서 기업이 약속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대제사장에 의해 속죄함을 받았다면 그 기업이란 얼마나 엄청날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의 기업이 주어졌다. 우리는 믿고 받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인가? 오늘 우리가 옛날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호산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영적 혜택을 더 많이 입었기 때문이다.
봉헌/다같이
찬송/150장
교회소식/인도자
찬송/154장
축도/표세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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