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11시 인도:표세철목사
찬송/18~41장
인사/내가 먼저 인사합시다
묵상기도/요4:24
찬송/3장
성시교독/교독문127사순절4
신앙고백/사도신경
찬송/292장
기도/지석임사모
성경봉독/고린도후서6:11~18
찬송/323장
설교/가까운사람 먼사람/표세철목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지 않고 내면으로 사귈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성도들이 모여 교제하는 곳, 믿음으로 배우고, 은혜를 나누는 곳이 곧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다툼이 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걱정거리가 된다. 몇몇 사람들이 과연 이 땅에 교회가 필요할까 하는 의심을 품는다. 심지어 교회 무용론까지 나올 정도이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었다. 당을 지어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패싸움을 하는 것이다. 은사운동이 일어났으나 교만하여 자기 은사가 최고라도 말하는 적도 있었다. 율법주의와 세속주의가 고린도 교회 안으로 들어왔었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교만과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러니 싸울 수밖에 없고,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성도들이 꼬여 있다. 교회는 내부적으로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멍 들었고 곪아 있었다. 바울이 수 없이 그들을 타일렀다. 눈물로 호소하고, 책망한 적도 있었다. 갈등을 봉합시키고, 분쟁을 조정한 적도 있었다. 쉽지 않은 노릇이다.
- 성도는 마음과 마음으로 교류한다.
갈등과 분쟁 그리고 싸움은 원인이 단 한 가지이다. 좁은 마음씨 때문이다. 한 사람이 좁은 마음씨를 가지면 선한 말도 왜곡해서 듣는다. 오해하여 듣고, 오해를 밖으로 쏟아낸다. 단순히 오해하였노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독설도 품어낸다. 한 사람이 이렇게 하여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독설을 들은 사람이 맞받아치고, 독화살과 같은 거친 말을 상대방에게 쏘아댄다.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중간에 화해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싸우던 사람이 화해시키는 사람을 향해 공격을 가한다. 일대일의 싸움이 이대 일의 싸움으로 확대된다. 조금 후에는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왜 그럴까?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좁다고 탓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넓은 마음씨로 화해와 평안을 권면하였다. 자녀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권면한다. 그런데 교인들이 오해한다. 바울을 공격한다. 싸움을 그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새로운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바울은 교인들 스스로 마음이 좁아졌음을 일러준다. 바울의 부드러운 권면에 보답하는 모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한다. 그렇다. 성도는 마음이 넓어야 한다. 넓은 마음으로 영적 교류를 가져야한다. 용서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넓은 마음으로 우리를 용납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넓은 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다.
예화-가짜와 진짜 한 여고생 동창모임이 있었습니다. 중년 여인들이 만나는 모임이기에 서로 아름답게 꾸미고 왔습니다. 그런데 가짜 귀고리와 보석반지를 끼고 온 친구들이 진짜 보석귀고리와 반지를 끼고 온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것이나 우리 것이나 다 똑같은 거야” 그러자 진짜 보석을 가진 여인이 화를 내면서 “어떻게 가짜와 진짜가 같을 수 있는 거니. 너희 것은 모조품이고 내 거야말로 진짜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여러 종교의 교주 중 한 분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조 반지를 진짜 반지와 동일시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자기는 죄를 용서할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반드시 자기가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공자도 죄를 지으면 하늘에도 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죄 용서함을 받는 길, 진정한 영생과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죄의 길과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소강석 목사/분당새에덴교회
- 믿지 않는 자를 거절하라.
성도들 사이에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용서함이 있어야 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일단 용서하면 함께 할 수 있다. 눈물로 서로 용서를 구하면 악한 감정이 사라진다. 관계가 회복되고 기쁨으로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예외가 있다. 용서했다고 하여 언제나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단들이다. 그들은 용서하고 안하고의 문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할 일을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도 믿음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용서란 개념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성립되지 않는 것을 한다고 나선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이 아닐까? 하나님은 이단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이단자는 불신자들이다. 잘못 믿고 있으니 믿지 않는 자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때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어들이지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요이 1:10~11). 성도는 이단자와 멀어야 한다. 진리와 오류가 분별되어야 한다. 성도는 함께 할 것은 함께 하되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예화-불을 꺼뜨리지 말라 제2성전 시대에 로마가 성전을 둘러싸고 ‘성전 번제단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나무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단 위에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레 6:8). 물 샐 틈 없는 감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가문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문 사람들은 벌레 먹지 않은 온전한 나무를 잘라서 사닥다리 옆에 감쪽같이 붙였습니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메고 당당하게 들어갔습니다. 보초가 못 들어가게 하면 “우리 집 나무 위에 새 집을 놓으려는 것이요. 사닥다리 없이는 도저히 새 집을 놓을 수가 없소이다”라고 말해 로마군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간 그는 사닥다리 옆에 붙어있는 나무를 떼어내 번제단 불속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나무를 공급했더니 불이 영영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문을 브나이 샬마이(Bnai Salmai)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사닥다리 가문(The Ladder Family)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보다 강한 것입니다.-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도는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다. 참과 진리 편에 서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놀라운 표현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장소이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장소, 영광을 보여주시는 장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장소는 사람이 지은 건축물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표현한다. 성도의 마음이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예루살렘에 헤롯이 지은 성전이 있으나 지금 고린도에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전이다. 헤롯 성전은 무너질 것이나 성전으로서의 성도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가도 주의 성도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도들과 특별한 언약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16절).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을 회복시킬 때 하신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자존감을 가진다면 마음이 좁아질 리 없다. 이단에 마음이 팔리지도 않는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근거하여 성도들과 선한 관계를 가진다. 이단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
예화-아버지의 격려 한 소년이 여덟 살 때 아버지에게 그림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책에는 트로이가 불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내가 자라서 트로이의 유물을 찾아내겠어요.” 아버지의 응답. “그것 참 대단한 비전인데….” 그는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저명한 고고학자가 됐다. 그리고 터키 북서쪽 언덕에서 찬란한 에게문명의 실존인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그 사람이 바로 세계적 고고학자 슐리만 박사다. 또 다른 소년이 작곡가인 아버지 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작곡을 하다가 상상력을 잃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소년이 말했다. “아빠, 내가 한번 해볼게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곡을 맡겼고 제멋대로 적어놓은 악보를 보고 격려해주었다. “이것 참 대단한 작품인걸.”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소년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됐다. 그가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요한 슈트라우스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제안을 묵살했다면 트로이의 유적과 아름다운 왈츠음악을 잃을 뻔했다. 아버지, 그는 자녀에게 최고의 교사요 격려자다.-임한창기자/국민일보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특별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진전시킨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구약에서 이미 언급된 것들이다. 본문에서 바울도 한 차례 언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혈연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독생자를 통해 믿는 사람을 자녀로 삼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이 성도들에게는 복음이다.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만 도 감사한 일인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 양자의 영이 왔다. 구원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인정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은 깨끗한 일을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한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깨끗이 씻기라고 명하듯이 주님께 돌아온 우리들은 죄로부터 정결케 되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정결하게 사는 사람, 넓은 마음씨로 성도들 영접하고, 분명하게 이단자와는 구별하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오셨다. 내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내게서 가까우시다.
봉헌/다같이
찬송/341장
교회소식/인도자
찬송/55장
축도/표세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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