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주후2020년5월17일(040516)
설교자-표세철 목사
본문-사사기 3:7-11
제목-구원자 옷니엘
수많은 국가들이 역사의 페이지들을 장식하고 있다. 강하고 거대한 나라가 수백 년 지속된 경우도 있고, 고작 몇 년 만 유지한 약하고 작은 나라도 있다. 강하고 거대한 나라는 역사의 많은 페이지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반면 작은 나라는 있었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큰 나라든지 작은 나라든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흥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라 이름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흥망성쇠가 비켜 가는 나라는 없다. 흥할 때는 흥할 만한 이유가 있고 망할 때 역시 망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들의 이면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흥할 이유나 망할 이유를 만든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도 좌우된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반드시 망할 만한 징조가 나타난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하고, 원망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라 안에 고통의 목소리, 죽겠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위정자들은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공동체든지 반드시 위기가 온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서서히 온다. 문제가 커졌을 때 해결하려면 쉽지 않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예화-낙심한 무디
무디(D. L. Moody)가 미미한 전도의 성과로 낙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찾아온 친구가 묻습니다.
"자네, 혹시 노아의 생애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는가?".
"아니, 그에 대해 특별히 공부한 일은 없다네".
친구는 노아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무디는 친구가 돌아간 뒤 성경을 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느라 여러 해 동안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견딘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노아의 가족 말고는 육축 즉 짐승만이 방주에 오를 수 있었던 부분을 읽으며 크게 깨닫고 외쳤습니다.
"아, 나의 조급함이 이리도 어리석은 것임을....."
그 순간 그를 눌렀던 침울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엎드려 하나님께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http://cafe.daum.net/yacop
1. 악한 일의 대가는 고통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을 행하였다. 악한 일이란 다름이 아닌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 백성들이 우상에게 절을 한다. 우상 숭배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우상숭배는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림의 결과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신 하나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역사를 잃어버렸다. 역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포기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만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고통이다. 하나님이 메소보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움직이셨다.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만들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메소보타미아에 파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소유하셨지만 소유를 포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을 포기하셨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을까? 팔년 동안이나 메소보타미아 왕을 섬겼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는 모두 메소보타미아 왕에게 바쳐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온갖 사소한 것들을 메소보타미아 왕에 의해 통제를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면 자기 소유와 자유가 그대로 있을 터이지만, 배신하면 자기 소유마저 넘어간다.
2. 고통 중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소유가 없다면 살아가는 재미가 없다. 소유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도 소유하는 재미가 없으면 인생을 살맛이 없다.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모으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런데 노예살이를 하느라고 이런 재미를 잃으니 누가 일하고 싶겠는가?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유가 없으면 인생이 즐겁지 않다. 말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으니 숨이 막힌다.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으니 답답하다. 처음부터 자유가 없었어도 살다보면 자유가 그리운데, 자유를 누리고 살다가 종살이를 하니 속에 화가 치밀지 않겠는가?. 이런 고통을 알기는 하지만 무엇 하나 처리할 수 없는 자기가 부끄러워 술로 세월을 보내는 지식인이 있다. 혹은 내 한 몸 희생되더라도 나라와 민족의 자유를 찾자고 비밀결사대로 나서는 젊은이들도 있다. 비밀결사대를 후원하는 부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소유와 자유를 빼긴 원인부터 찾아야 한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요,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면 회개해야 한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목 놓아 부르짖어야 한다. 이 부르짖음은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탄식의 부르짖음이며, 동시에 구원을 애타게 사모하는 부르짖음이다. 고통을 만났는가? 그 원인이 어찌 되었든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렘 33:30).
예화-낮아짐과 은혜
70년대의 한 인기 가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대마초 사건에 걸려 감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3개월가량 징역을 살았는데 거기서 어느 사형수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진지한 전도에 감동을 받아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사형수가 “당신은 곧 나가게 되겠지요.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 위해 못다 한 몫까지 합해서 해주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해서 감방에 들어와 있을 때만 해도 자기가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었습니다. 대마초에서 해방을 받았던 것입니다.
출감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사형수가 판사보다 구원받기 쉬운지 압니까.
사형수는 자기에게 대해 절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감방 밖에 있을 때 보다 안에 들어가서 예수 믿기가 쉬운지 압니까.
감방 안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절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시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진지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붙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이 절망에 서 건질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옥한흠 목사
3.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반응하시겠는가? "죄를 지은 대가로 고통을 받으니 맛 좀 보라‘고 모른 척 하실까? 혹은 ’나를 버릴 때는 언제고 찾을 때는 언제냐‘며 꾸중하실까? 혹은 너희들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실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심지어 이방인의 회개조차도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신다. 내리시려 던 재앙을 멈추신다. 백성들 전체가 죄를 지었어도 모세 한 사람의 회개와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내리시려 던 재앙을 멈추셨다. 오늘 하나님은 부르짖음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 구원자를 세우셨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압제를 받는 백성을 구할 용사를 선택하여 세우셨다. 그 용사가 곧 옷니엘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우셔서 민족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셨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우셔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백성들을 구하셨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지도자 한 사람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고, 망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 옷니엘 한 사람이 백성을 구하였고, 예수님 한 분이 온 인류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분이 사단과 싸워 이기셨다. 죄악과 싸워 이기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다.
4. 세워진 구원자가 공동체를 구한다.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사사란 재판관이란 뜻이다. 그가 재판관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물론 옷니엘이 인격과 용맹함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이 버리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인격과 용맹함이 효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사사로 세워지고 사사의 직책을 수행한다. 사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구원하고 다스린다. 옷니엘이 메소보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과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하나님이 대적을 옷니엘의 손에 붙이셨다. 하나님이 옷니엘을 이기게 하셨다. 그리고 옷니엘의 다스리는 기간에 이스라엘에게 태평함이 있었다. 그 태평함이 4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백성이 구원받고, 공동체가 평안해진다.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고 나섰다가 백성을 괴롭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이 지도자는 결코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이다. 자기의 사명을 다하면 깨끗하게 물러설 줄 아는 지도자이다. 결코 권력을 탐하거나 놓지 않으려고 억지를 쓰지 않는다. 이런 지도자가 공동체를 구하는 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