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2022년2월27일 주일낮예배
https://www.youtube.com/watch?v=Ay5bkHb_oVc
오전11시 인도:표세철목사
찬송/580~584장
인사/내가 먼저 인사합시다
묵상기도/이사야19:25
찬송/580장
성시교독/교독문99나라사랑1
신앙고백/사도신경
찬송/581장
기도/표세종안수집사
성경봉독/잠언4:8
찬송/582장
영상/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설교/그를 높이라/표세철목사
모레가 삼일절입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먼저 독립투사 유관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관순은 1904년 3월 26일 충남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령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의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후,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보다 교육이라 생각하고, 몇 동지와 힘을 합하여 홍호학교를 설립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는 일직이 그의 동리에 유무기,조인원 등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유관순의 어린시절은 바로 이러한 가정과 배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부정불의에 대해서 용감하며, 불쌍한 이웃에게 사랑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 소녀였다.
유관순은 당시 공주 및 천안지방 순회선교사였던 사부인(Mrs.Alice H.Shap)의 소개로, 이화학당 프라이(Frey Miss Lulu E)당장(堂長)시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화 80년사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 들어와 공부하는 동안,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줄 뿐 아니라,청소도 남의 몇 배를 하였고, 기숙사 식비를 못 내어서 괴로워하는 친구의 식비를 서슴치 않고 내주는 의협의 소녀"였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 학교에서 3.1운동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의 총지휘자였던 박희도 전도사의 지시에 의해서, 처음에는 전교생이 참가할 만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3월1일 막상 교문을 나서려고 할때, 이를 눈치 챈 학교당국의 만류로 말미암아 유관순을 포함한 15명 정도만이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 대열에 참가하였다. 그 후 3월5일에 또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학생들이 학교당국 몰래 참가하였다.
이렇게 학생들마저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니 일제당국은 더 이상 수습할 길이 없어 3월 10일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이렇게 해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 온 유관순은 고향에서는 아직도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있지 않음을 놀라와 하면서 오빠와 동리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곧 운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양력 4월 1일이 바로 음력으로 거사 날을 잡았다. 그리고는 뒷산으로 올라가 매봉에 봉화를 올릴 때 그것을 신호로 해서 장터로 모이게 하였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자 오후 1시경 3,0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조인원이 군중 앞에 나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읽은 후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선도자를 따라 군중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칼로 내리쳤다.
이것을 보고 격분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평화적 시위에 마구 사람을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살기가 등등한 헌병은 항의하는 그를 한 칼에 내리쳐서 쓰러뜨렸다. 이렇게 시작한 헌병과의 충돌로 아오내 장터는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때의 사망자는 유중권(유관순의 아버지),이씨(유관순의 어머니),김구응,김상헌,서병순,박상규,김치관,한상필,윤희처,유중오,채씨,윤해영,이성하,박병호,신을우,박유복,박학형,방치성,박준규 등 19명이다. 그리고 부상자는 적어도 30여명이나 된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관순은 먼저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갇힌 채 한 10여 일 동안 고생한 후, 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는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초심을 받고 불복, 공소하여 6월30일에는 병천 시위의 주동자 조인원 등과 같이 3년 언도를 받았다. 3년 언도를 받은 유관순은 또 다시 서울 복심법원으로 상고를 하였다. 그는 재판장에게 의자를 내던지며,"일본인에게는 재판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든지,"무슨 잘못이 있어 재판을 받느냐"는 등 대드는 바람에 일본인들에게 극도로 미움을 사 법정 모독죄로 4년이 추가되어 7년 언도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동지는 다 공주로 내려갔지만, 그만은 혼자 서대문 감옥에 남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개성 운동의 주동자였던 감리교인 어윤희,권애라,신관빈을 만나게 되었다. 1920년 3월 1일,3.1운동 1주년이 되자 또 다시 감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도 여기에 참가하여 여러 번 모진 고문을 받았다. 끝내 매 맞은 독으로 인해서 소생하지 못하고, 1920년 10월 12일, 꽃다운 1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그의 유언은
["일본은 망한다. 절대로 망하고야 만다."] 는 것이었다. 그가 죽자 형무소에서는 그 시체를 몰래 처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후에 탐지한 이화학당 교장 미쓰 프라이오 미쓰 월터는 곧 형무소로 찾아가 그 시체를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참혹한 형체를 보고 소동이 일어날까봐 내어주지 않으려 했으나, 만일에 내어주지 아니하면 외국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하니,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어 내어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수의를 장만해서 동강난 몸을 맞추어 입히고는, 새벽녘 정동교회당으로 가 조용히 장례식을 마친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독립 제단위에 17세의 처녀 유관순은 아낌없이 그의 몸을 바치게 된 것이다.
예화-항일투쟁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교회
1910 일제가 한일합방을 강행함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항일 투쟁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대표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신민회의 105인 사건입니다. 이 신민회는 숭실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이 123명이었는데 그 중 93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선교사만도 24명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범 민족적으로 일어난 항일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봉에는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33명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0.9% 밖에는 안 되는 정말 미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박해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전국 교회가 이 일에 분연히 일어나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는 신한청년단이었습니다. 이 신한청년단은 상해한인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신한청년단의 대부분의 인사들이 상해한인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상해한인교회를 두고 “기독교를 이용해서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계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당시 미미했지만 독립운동의 무시 못 할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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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전능자가 자기편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편이면서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와 사망의 마귀편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공과 복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고 계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의 편이 되십니까 ?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높이라! 그리하면 높이 들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린 목동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넘어뜨릴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자에게는 실패와 절망이 없고, 성공과 승리뿐입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과 공덕만을 앞세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모습을 주님의 십자가 뒤에 감추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앞세우며 나아가야, 만군의 여호와께서 반드시 함께하여 주십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품으면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내실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간절히 부르짖어 동행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2장 7절에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자식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감사의 생활이 넘치는 자의 편이십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마음으로 감사하고, 몸으로써 감사하며, 물질로써 감사함은 물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감사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데에 조금도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일에 게을러서도 안 됩니다.
경외하며 섬기는 일에는 감사 생활을 하는 일에도 남에게 뒤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 이후부터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됨으로써 여호와께서 항상 우리의 편이 되시도록 노력합시다!
봉헌/다같이
찬송/583장
교회소식/인도자
찬송/584장
축도/표세철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