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쓸 만 한 설교유머 19-3
쓸 만 한 설교유머 19-3
* 강도와 불치병!
노인이 사는 집에 강도가 침입해서 주인을 협박했습니다.
“손 들어! 조용히 해! 소리치면 죽어!”
“네! 네!”
“집에 있는 돈하고 귀중품 다 내놔!”
“네! 네!”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강도의 마지막 협박에 노인의 얼굴색이 겁먹은 표정에서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손을 내리더니 칼을 든 강도에게 다가서며 소리쳤습니다.
“뭐?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이놈아! 의사도 살릴 수 없다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살린다는 거야! 이~런! xx”
노인의 분노에 깜짝 놀란 강도는 노인 집에서 도망 쳐 나와야 했습니다.
말 한 마디가 사람을 바꾸고,
상황과 분위기를 바꾸고, 생각과 태도를 바꿉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남이 듣고 싶은 말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말싸움은 모든 싸움의 시작입니다.
어떤 싸움이든 시작되기 전에 막을 수 있습니다.
말을 잘 하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때문에 결국 싸우게 됩니다.
어떻게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모든 대화는 거래입니다. 감정이든 물질이든, 정서든....
손해보고 어떻게 살라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손해가 없었으면 인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성도가 조금도 손해 볼 각오를 하지 않는 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손해 보는 사람에 의해서 평화가 유지 됩니다.
아무도 손해 보려 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고 치열한 싸움만 있게 됩니다.
지금 현대 사회가 이렇게 소란하고 아픔이 많은 것은
손해 보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유지 되는 것은 부모의 손해 때문이고
교회가 유지 되는 것도 조용히 헌신하며 후원하고 손해 보는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는 것을 너무 가슴 아파 하지 마세요!
감정과 노력과 시간과 관계와 물질을 손해 보고도 오히려 잘 살 수 있다면
그 것보다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도 손해 보려 하지 않으면 삶은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 불침번
부대에서 일직사관이 순찰을 돌고 있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불침번 근무자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난 일직사관이 내무반에 들어가서 소리 쳤습니다.
“불침번 어디 있어?”
고함 소리에 모든 병사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무반 구석에서 개미소리처럼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일직사관이 다가가 보니 불침번 근무자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습니다.
일직사관이 소리쳤다.
“근무자가 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거야?”
불침번이 대답했습니다.
“네! 저는 지금 잠복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규칙이 자기 맘대로 재해석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종종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내 인생 내 맘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 그래?”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생답게 살아야 합니다.
함께 있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조화는 규칙과 법과 질서, 예의, 양심과 도덕입니다.
성도는 그 것에서 더 나아가
거룩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조화를 이루어 가는 정도가 아니라
깨진 조화도 연결하고 끊어진 관계도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장14-15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무는 것이고,
성도의 십자가는 나와 너의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막는 담은 누가 허물 수 있을까요?
내가 아니면 나와 너를 가로막은 담을 허물 수 없습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원리 원칙 도리, 양심 정도가 아니라
양보와 희생과 헌신, 인내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말세는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말로는 핑계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빠져나가는 일이 많아집니다.
딤전4:3-4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
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바른 교훈을 버리고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이상하고 허탄한 논리와 핑계가 난무하는 시대.
그 것이 말세의 증거입니다.
내 맘대로 말하고 , 해석하고, 사는 것은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맘대로가 아닌 거룩한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 여기가 지옥입니다
이리저리 바쁘게 일 하며 시달리던 사람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며칠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새로운 세상에 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바가지 긁는 아내도,
결재서류를 팽개치는 부장도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알아서 척척 해주는 보좌관이
그의 일을 다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앉아서 먹고 놀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꿈에 그리던 신나는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나니 먹고 노는 것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 하고 있는 보좌관에게 말 했습니다.
“이봐! 보좌관, 내가 할 일을 자네가 다하니, 이제 내가 좀 도와주겠네!”
“안 됩니다. 여기서는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드리지만
일하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대답 했습니다.
“아니 무슨 천국이 이래?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차라리 지옥이 낫겠어!”
그러자 보좌관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여기가 지옥입니다.”
일이 많으면 힘들고 피곤 하지만
일이 없으면 사는 것이 무료 해 집니다.
일 없이 먹고 노는 곳이 과연 천국일까요?
자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은 아닐까요?
한 평생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현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일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다면
그 일의 목적을 바꾸고.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같은 일을 해도 즐겁고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평생 키우던 소를 왜 팔까요?
소를 팔아 자녀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같이 아끼던 소를 파는 것은 죽도록 싫지만
자녀의 미래를 위해 그 싫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피곤하고 어려운 일을 통해
가족이 평화롭고 자녀가 행복할 수 있기에
평생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의미가 담기면
세상의 모든 일은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내가 만든 음식으로 누군가 배부르고
내가 하는 봉사로 누군가 즐거울 수 있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참을 수 있고,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화나는 일, 속상한 일, 답답한 일이 생겼다면
그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를 생각 해 보세요!
성도는 일 자체보다 일의 의미를 볼 줄 알고,
일에 아름답고 거룩한 의미를 부여 하는 사람입니다.
한국 가정행복센터&부부행복학교. 김홍식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