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 2024년 12월 16일 월요일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태어나자 않는 것이 나에게 더 좋았을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평생 지을 죄를 미리 알고 있었고, 그 죄 때문에 연속해서 일어날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내가 인생에서 감당해야 할 모든 종류의 슬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으며,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상태에서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 관하여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다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을까?
우리는 절대적 권한을 지닌 주인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은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의견을 묻지 않고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이 땅에서 살아갈 기간도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설령 자살한대도, 자살을 결정하는 심리 상황이 언제 닥쳐올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심판받는다. 그러한 주인과 논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것보다 우리 주인을 만날 준비나 착실하게 해두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영원을 대비하는 방법중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지금 영생을 얻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유다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유다도 피로 맺은 그 깰 수 없는 언약에 동참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형제라고 부르는 일을 창피하게 여기지 아니하신다. 유다를 형제라고 부르는 일도 창피하게 여기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전에 예수님은 유다를 친구하고 부르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현세의 삶을 천국의 영원한 삶에 이르기 위한 전주곡으로 여겨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올바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 이 거듭남에 대하여 우리는 기꺼이 "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택한 받은 백성이 되라는 하나님의 결정에 기꺼이 따르면서 거듭날 수 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순교자의 소리 리처드 웜브란트